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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나는 술꾼이로소이다

작성자 : 술꾼 작성일 : 2010.12.30 10:34:25 조회수 : 3914
 

 나는 벌써 이태 째 매일 아침 세 가지의 가루를 먹는다. 쥐눈이콩으로 만든 청국장가루와 칡가루, 솔잎가루가 그것이다. 아침 대용으로 먹으려고 시작한 것인데 아침은 아침대로 또 먹으니 식전식이 되었다. 모두 나의 건강을 염려하는 처와 부모님이 직접 농사짓고 채취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염려할 만큼 허약하거나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데도 지성으로 그 세 가지 가루를 해주는 이유는 내가 장복하고 있는 술, 담배 때문이다. 술과 담배를 퇴치하기 위하여 주야로 맞서 소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그 가루들이 좋다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그 노고와 술, 담배로 인한 가계의 부담을 생각하면 나는 마땅히 당장 두 가지 모두를 끊어야 한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사는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우리 집안에서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은 나뿐이다. 아내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아우도 알코올과 혹 만나다해도 데면데면하다가 한두 차례의 볼가심으로 곧 외면해버리는 정도다. 윗대의 할아버지들도 술을 입에 대지 않는 특이한 가문이었는데 나에 이르러 홀연 자욱한 누룩의 향이 집안을 감싸더니 가풍의 일대 쇄신이 일어난 것이다.


 술의 청탁과 안주의 근원을 가리지 않고 동반하기 어언 이십여 성상, 하루를 거르면 아쉽고 이틀을 거르면 차마 그리운 내연(內緣)의 세월이었으니 돌이켜 생각하매 뜨거운 한 줄기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열여섯 무렵이었지만, 그녀는 내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쉽게 곁을 주지 않았다. 나는 처음 만난 그녀의 쏘는 듯 매운 성정과 한번 만나고 나면 찾아오는 정체불명의 두통, 그리고 주위의 달갑잖은 시선 때문에 마음 놓고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만나볼수록 몽롱함과도 같은 그녀의 눈빛과 은은한 체취는 거의 비틀거릴 정도의 매혹이었다. 드디어 대놓고 그녀를 만나도 좋은 나이가 되자, 나는 공사석을 불문하고 그녀를 동반하였다. 그녀 역시 성인이 된 나를 축하라도 하듯이 온몸을 던져 내게 불꽃같은 정열을 일으키는가 하면 달변의 혀가 되었다가 마침내 장소에 구애됨 없이 잠에 떨어지는 대범함까지 선사하였다. 실로 새로운 천지가 그녀 안에 있었다. 그녀를 만나는 자마다 모두 비슷하였으니 유유상종이라, 나의 주위에는 온통 그녀와의 사랑에 빠진 무리들로 차고 넘쳤다. 대학 생활 내내 나는 대학이라는 곳이 그녀와의 사랑 외에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책값은 부풀려졌으며 하숙생활은 비밀리에 자취로 바뀌었다. 자취방의 구석에는 항상 그녀가 벗어놓은 크고 작은 외투가 쌓였고 때로는 한 자루나 되는 외투를 지고 가서 온전한 그녀와 바꿔 가슴에 품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우리는 곧잘 그녀를 피에다 비유했거니, 그 애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녀와의 집단적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십대가 다 가기 전에 누군가는 단호히 관계를 청산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그녀의 옷고름을 만지작거리거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으로 차마 끊을 수 없는 애정의 끈을 이어갔다. 여전히 그녀의 깊은 속살과 교접하는 사람들은 뿔뿔이 자기만의 성채로 그녀를 모셨고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른 봄이다. 바람도 찬 기운을 잃었고 양지쪽에는 산수유나무 꽃이 피었다. 농사일도 아직은 한 나절 하고 나면 이틀쯤은 할 일이 없다. 산에는 제일 먼저 나는 산나물인 땅홑잎과 원추리가 한창이다. 삶아도 별반 줄지 않는 그 나물들을 다진 마늘과 소금과 들기름만으로 무쳐 보시기에 담고 거냉한 막걸리 한 주전자와 함께 산수유 꽃그늘로 간다. 겨우내 마른 은행잎과 산에서 날아온 가랑잎, 단풍잎들이 방석이 되어준다. 인적이 끊긴 오후의 햇살은 나른하고 첫잔을 든 손길은 조급하다. 막걸리 한 대접을 남기지 않고 단숨에 낸다. 막걸리는 겨냥했던 곳으로 정확히 떨어져 포연과도 같은 술기운을 재빠르게 머릿속까지 퍼뜨린다. 다시 대접을 채우고 나물을 집는다.


 문득, 내 나이가 마흔 둘이다. 삶에 대한 낭만적 가능성이 사라진 나이,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들에 대한 회한의 나이, 별빛처럼 반짝이던 상상력이 뿌연 욕망의 안개 속을 헤매는 나이, 또 한 잔을 마신다. 사는 일이 구차하고 쓸쓸해진다. 늙어 아픈 곳이 많은 부모님과 손톱 여물을 썰어가며 살아가는 아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것들, 그들이 오로지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까지도. 제 어미와 함께 아이들이 나온다. 나 있는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제각기 호미 하나씩을 손에 든다. 냉이라도 캐러 가는 모양이다. 가여운 것들, 아비가 이 세상 굴러가는 속내와는 사뭇 다른 길밖에 알지 못하니 앞으로의 날들이 더 쓰리고 아프리라.


 반 주전자쯤이 비었다. 취기는 온몸으로 퍼져가지만, 내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붉다. 철없던 시절의 악행과 비루했던 변명들, 비수처럼 쏟아낸 독설들이 고스란히 소금이 되어 얼굴을 문지른다. 미안하다, 내게서 상처받은 벗들, 여인들이여.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디에서 나에게 준 상처 때문에 가슴 아플 이에게 이미 오래 전에 용서했음을 전한다.


 바람에 날린 산수유 꽃잎이 술잔으로 떨어진다. 짝을 찾는 장끼 한 마리가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른다. 갑자기 세상이 환해진다. 봄날이다. 가늘게 뜬 눈길 너머에는 낙엽송들이 연초록 옷을 갈아입고 있다. 이내 주전자가 빈다.


 술을 조금 줄일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제 중학생이 되는 큰 딸의 지청구가 대단하다.


 “아빠, 그렇게 술을 마시면 첫째, 아빠의 건강이 나빠지고 둘째, 우리랑 이야기할 시간이 없고 셋째, 애들한테 나쁜 영향을 끼쳐. 두일이 좀 봐. 물을 마셔도 꼭 소주잔으로 마시려고 하잖아.”


 마땅히 대꾸할 틈새도 없이 오금을 박으며 따지는 품새가 제 어미는 저리 가라다. 자식이 제일 무섭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생각해보아도 득보다 해악이 월등한 것이 술이다. 흥겨움을 더하기도 하지만 분노의 기폭제가 되는 일이 많고 나처럼 홀로 마시는 술은 그 유혹의 강도가 심하여 그 품속만이 가장 아늑한 곳이라는 거짓 환상을 일으킨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고 취하였다가 깨어나기까지 그 긴 시간이 아깝다.


 무슨 일을 하던 게으름을 피워도 좋은 나이는 아닌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할 시간도 부족하다. 머지않아 부모의 품을 떠나갈 아이들과, 살아계실 날을 가늠하지 못할 부모님, 보잘 것 없는 대로 십년 넘게 가꾼 나의 삶터,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 애태움 끝에 이제야 조금씩 손을 내미는 소설이라는 괴물과의 한 판 싸움을 위해 술을 줄이려 한다.


 내연의 관계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필경 파탄이 온다. 물론 그 오랜 연인과 무 자르듯 절교를 선언 할 만큼 나는 냉정하지 못하며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독한 매혹과 유혹이었던 그녀도 함께 나이를 먹으며 편한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술꾼이니까.

 

 

최용탁 '미궁의 눈'

1965년 충북 중원군에서 태어났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이민, 잡화상 등을 하다가 영구 귀국하여 충주시 산척면에 정착했다. 농사일 틈틈이 써온 소설로 마흔둘에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2007년 첫 소설집 『미궁의 눈』을 발표했으며, 어린이책 『이상한 동화』와 『계훈제 평전』을 집필했다. 현재 충주에서 과수원을 하며 소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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