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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어린 노동자를 싣고 가는 마지막 버스

작성자 : 시인 작성일 : 2010.11.24 09:26:07 조회수 : 3748

 

초여름이었다. 마을 앞 정자 솔밭에서 청매미가 귀를 찢게 울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친 텃밭 들머리에 감잎은 무성했고, 더위에 한창 무르익은 고추며 오이며 호박이며 하는 것들은 가지마다 줄기마다 열매가 주렁거렸다. 병든 아버지는 감나무에 여윈 등을 기대고 하루 종일 앉아 계셨다. 간혹 숨 넘어갈듯 기침 소리가 커지면 밭고랑을 무심히 서성이던 나는, 걱정스레 아버지 쪽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의 눈빛은 가까운 밭이나 들녘이 아닌 보다 먼 바다를 향해 하염없이 열려 있었다. 아주 멍한 회색의 눈빛.....

"저그, 장성포 말이다."

아버지는 벼포기 아득한 버드네 들 너머 방조제를 가리켰다.

“왜정 때, 저 뚝막이 공사를 할 때, 난데없는 비바람이 굉장히 험한 날 밤에, 크나 큰 호마를 탄 일본 놈이 하도 지-랄을 허길래......”

그 놈을 죽였다고 했다. 가마니를 쌓아 밤낮으로 간척사업을 하던 갯뻘 뚝밑으로 그 놈을 밀어넣고 쥐도 새도 모르게 공구리를 쳐버렸단다.

“난생 처음 기차를 탔어야. 함경도 원산으로 비행장 일허는데 갈라고.”

태풍이 몰아치는 깜깜한 밤에 왜놈은 낙마한 걸로 알려졌지만, 그 일에 가담한 장정 몇은 암만해도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단다. 아버지가 가리키는 철길에 마침 느릿느릿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목포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경전선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 철길을 타고 아버지는 열 여섯인가 하는 나이에 부산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함경도까지 숨어들어가 비행장 만드는 일을 했을 것이다. 해방되고, 배고픈 세월은 핏줄처럼 이어져, 어머니와 자식 일곱을 낳고 살았으나 달라진 게 없었다. 일흔도 넘기지 못한 나이에 폐암으로 쓰러진 순간까지도.


독립투사도 아닌 아버지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평생 동안 간직한, 죽음에 임박해서야 아들인 나에게만 조심스럽게 누설한 그 비밀이 담긴 철길을 타고, 누님 셋과 누이 둘이 주저주저 떠나갔다. 모두 어린 나이였다. 큰누님은 부산으로, 둘째와 셋째 누님은 서울로 갔다. 큰 누님만 어찌해서 어머니가 비단행상을 하며, 당시에 재건중학교라는 곳을 어렵사리 보냈고 나머지는 전부 국졸이었다. 누님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예뻤다. 유독 눈이 꽃숭어리처럼 예쁜 둘째 누님은 서울의 동광모사에서 부터 버스 안내양까지 꽃다운 시절을 낙화시키고, 시집을 간 뒤에도 이날 이때까지 도배공으로 일하고 있다. 70년대 말이었으니 오죽했을까. 언젠가 명절 때 집에 돌아온 누님은 월간 '대화'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거기에는 유동우의 '어느 돌맹이의 외침'이 실려 있었는데,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그 글은 국민학생이었던 나도 읽었던 기억이 새롯이 떠오른다. 아뭏든, 누님들이 떠났던 길을 나중에는 누이들이 따라갔다. 시대가 한참 바뀌어 누이들 나이 때만 해도 대부분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누이들은 중학교 졸업 후에 곧장 공장으로 갔다. 꼽아보자면, 손밑 누이가 1984년, 막내가 1987년에 중학교를 마쳤으니 그리 먼 세월도 아니다.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유일하게 막내만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 정말 우리집이 그만치나 가난했을까. 아니면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오빠인 나 때문이었을까. 누이들을 보면 여러모로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손밑 누이가 부산으로 떠나던 날. 아직도 구정설이 한 달이나 남은, 중학교 졸업식을 하기도 전에, 누이는 관광버스를 타야만 했다. 부산의 사상공단에 있는 신발공장에서 인솔자가 어린 학생들을 실러 왔다. 캄캄한 새벽, 봉두산 칼바람을 맞으며 어머니와 함께 누이를 배웅하러 나갔다. 면사무소 앞에는 버스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누이가 버스에 올라 탔다. 태어나서 처음, 낯 설고 물 설은 타관으로 나가는 첫차를 어린 누이는 그렇게, 해맑은 얼굴에 피어린 노동을 팔기 위해 몸을 실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찐밤과 계란, 김이 말린 찰밥을 싼 봉다리를 누이에게 쥐어주며 참 많이도 울었다.

“이 거, 가다가, 배 고프먼 묵그라....”

열려진 창문을 차마 닫지 못하고 누이를 실은 버스가 떠난 뒤에도 어머니는 텅 빈 면사무소 마당을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 버스가 아마 내 기억으로는, 산업체 병설학교로 진학을 시켜 준답시고 어린 여공들을 굴비엮듯 실어간 마지막 버스였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는 '산업체학교 진학생 모집'이라는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누이는 물론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부산에 도착해 보니 공장은 아주 작은 하청업체에 불과했고, 날마다 잔업 때문에 사장은 애들을 학교에 보내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87년. 이듬 해에 올림픽이 열린다고 온 나라가 난리법석일 때, 막내마저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서울로 갔다. 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봉제공장 시다로 열 여섯 살 어린 노동자가 되었다. 왼손잡이인 막내는 가위질 하는 일이 서툴러 봉제일을 누구보다도 힘들어했다. 지금도 손밑 누이는 여전히 미싱을 탄다. 공장 다닐 때, 미싱 대가리가 죽기보다 싫다더니, 이젠 애들 키워놓고 기술 있으니, 한 달에 돈 백 만원 벌이가 어디냐며 못내 자랑삼아 밝게 웃는다. 하지만 오빠인 내 마음은 왠지 짠하기만 하다.


요즘엔 일부러 다니기 싫어서가 아니면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중고등학교를 상급학교라고 취급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이 나라 모든 가난한 가족사의, 국졸과 중졸이 학력의 전부인 내 누님과 누이들이 겪어온 가슴 아린 세월은 이미 지났다. 더구나 궁핍한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세대도 바뀌었다. 아, 그렇다. 풍요로운 자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풍요롭게 빛난다. 이제, 어린 노동자를 태운 마지막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경전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달리던 비둘기호도 사라졌다. 그 철길 따라 서울로, 부산으로 막막하게 실려가던 애달픈 꿈과 희망 또한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그것이 아주 먼 과거인가? 그날을 추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겐 그 기억은 지폐보다 소중한 삶의 가치인 것이다.

 

 

 

임성용 '하늘공장'

1965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으며 구로, 안산공단에서 공장노동자로 일했다. 1992년부터 노동자문예 『삶글』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2년 제11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하늘공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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