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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아이스깨~~끼!

작성자 : 시인 작성일 : 2010.11.23 11:10:49 조회수 : 3742

 ※ 이 이야기는 1975년쯤 조성에서 제 주변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아이스깨애~끼!

 

  마을회관 마당에서 신나게 뛰놀다가 아이스깨끼, 그 소리만 들리면 아이들은 동작을 멈추었다. 모두들 머루알 같이 까만 눈을 떼굴떼굴 굴리며, 동구밖 논밭 사이로 난 사랫길에 아이스깨끼통을 메고 올라오는 깨끼장사에게 일제히 눈길이 쏠렸다. 입안에서는 절로 달짝지근한 군침이 감돌았고 어떤 애들은 복날 개처럼 벌써부터 능적지근한 침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깨끼를 사먹을 돈이 누구에게도 없었다. 자못 힘이 센 고학년 형들은 저보다 어린 애들의 고무신을 벗겨 깨기와 바꿔먹었다. 그들은 입으로 물씬 베어 먹고 애들에게는 혓바닥으로 조금씩만 빨아 먹게 했다. 그런 날 저녁이면 신발을 빼앗긴 집의 부모들은 애들을 댓설팽이로 등줄이 쪽쪽 갈라지도록 두들겨 팼다. 그렇게 맞고도 아이들은 아이스깨끼의 유혹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장날, 나는 무슨 뱃장이 생겼는지 장보러 가는 어머니에게 엄포를 놓았다.

"아이스깨끼 안사다 주믄 나두 고무신 바꾼다! "

"수박 사오마. 식구들 같이 묵어야제. 깨끼는 녹아서 못 사온다."

"그라믄 돈 줘!"

"돈 없다. 니가 나중 돈 많이 벌어 사 묵어라."

"달구색히(금칙어라 게시가 안되어 바꾸어 올림) 한 마리 팔믄 깨끼 한 통 살 수 있으까?"

"달구색히는 알 난다. 니는 그래 깨끼 사 주믄 묵고 뭘 나줄라고?"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래도 암탉만도 못했다. 그것이 어린 마음에도 슬퍼 달구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아마 어머니는 내가 아이스깨끼가 먹고 싶어 그리 운다고 여겼을 것이다.

 

  상수리 푸른 잎이 누렇게 늘어지도록 더운 여름 날, 덧고개 마루에서 동생들과 함께 상수리나무에 붙은 찌께와 핑갱이를 잡고 노는데, 진등뫼를 넘어오는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는 여느 때와 달리 보퉁이도 이지 않은 머리에 양쪽 활개를 내저으며 바삐 달려오고 있었다. 덧고개에 올라 그제서야 한숨을 돌린 어머니의 손에는 아이스깨끼가 들려있었다.

"어여 와, 이거 묵그라. 녹으까 싶어 장에서 여까지 달음박질쳐 왔다. 아이고, 숨 차!"

어머니는 아이스깨끼 꼬지를 손에 꼭 쥐고 행여 녹을새라 숨가쁘게 달리면서, 녹아 흐르는 단물을 빨아 마시면서, 윗통은 약간 볼록하고 끝은 뾰족하게 닳아 없어진 아이스깨끼를 나와 동생들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때, 어머니의 얼굴에 온통 뒤범벅된 땀방울과 젖무덤이 훤히 드러날 만큼 잠방 젖은 옷과 금방이라도 녹아내릴듯 땡볕에 타는 눈빛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아이스깨끼를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나보다 두 살 위인 큰형은 원없이 아이스깨끼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고작 국민학교 사학년에 불과한 나이였는데, 아예 깨끼통을 메고 나섰다. 깨끼장사는 열 개를 팔면 한 개를 장사하는 사람에게 덤으로 주었다. 나하고 나이는 동갑이었으나 생일이 한참 빠르고 덩치가 컸던 외사촌 형이 집안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먼저 깨끼장사를 하고 있었다. 큰형이 깨끼통을 메고 다니는 사촌 형을 시장에서 만나 같이 하자고 졸랐고, 그길로 의좋은 외종형제는 아이스깨끼를 팔러 다녔다. 깨끼를 떼 주는 가게는 면내의 시장통 버스정류장에 있는 월남상회였다.

 

  월남상회는 일 학년 때, 우리반 담임선생이었던 박○○네 집이었다. 박○○! 그 독살맞고 손이 매서운 여선생은 갓 한글 철자도 못 깨친 애들에게 받아쓰기를 못한다고, 전부 발가벗겨 책상 사이의 마루바닥에 꿇어앉혀 놓고 수업을 했다. ‘그런 년’이 선생이었으니 그 부모라고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철없이 학교 다니는 애들을 불러 모아 깨끼통을 메게 하고 단 한 개의 에누리도 주지 않았다. 다른 집이라면 몰라도 그래도 선생님 집인데, 설령 부모된 자가 애들에게 그런 애꿎은 일을 시키면 명색이 선생이라는 박○○라도 나서서 말렸어야 하거늘, 애초부터 교육이라곤 시험지에 답장 쓰는 것 밖에 모르는 애꾸눈이 박힌 선생은 학교를 나오지 않고 아이스깨끼를 팔러 다니는 학생들을 봐도 못 본 체 했다.

 

  보통 깨끼통은 중학생쯤 되는 애들이 메고 다녔지만, 아직 나잇살이 차지 않은 큰형과 사촌형은 그 무거운 통을 메고 하루 종일 땀을 삐질거리며 돌아다녀봐야 겨우 열 개, 스무 개 팔기도 힘들었다. 스무 개면 아이스깨끼 달랑 두 개가 제몫으로 돌아오는데, 돈으로 치면 십 원이었다. 그나마 십 원이라도 벌면 다행이건만 날씨는 덥지, 목은 마르지, 통은 무겁지, 장사는 안 되지..... 그래서 덤을 남기고 팔기도 전에 한 두 개씩 아이스깨끼를 꺼내먹기 일쑤였다. 결국에는 며칠 못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다. 입금시킬 돈은 없고 아이스깨끼를 동네 애들까지 불러 모아 열 개 이상 먹어버린 날에, 때마침 두 형제는 외삼촌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누군가에게 귀뜸을 들었는지 외삼촌은 솥뚜껑만한 손으로 단박에 깨기통을 엎어버리고 월남상회를 찾아갔다.

"사탕물에 팥가루 좀 섞은 깨끼 몇 개 갖구선 학교 댕긴 애들헌티 장사를 시켜야?"

다행히 월남상회 주인과 외삼촌은 익히 막역한 사이였다. 큰 시비없이 깨끼값을 물어주지 않아도 되었다.

"야가 자네집 자제였든가? 쬐깐헌게 눈알이 툭 불거져가지고 예사 되바라졌구만! 오학년이라고 둘러대서 말이시.... 암만해도 아닌 것 같드라니. 재앙떨잖게 키울라믄 속깨나 썪겄네."

"재앙을 치든 말든 항차 깨끼장사야 할라고?"

외삼촌은 월남상회 주인이 건네준 아이스깨끼 하나를 입에 물고 나왔다. 깨끼를 우적 씹으면서 외삼촌은 볼이 터질듯 웃어 제꼈다.

"아따야, 고거이 솔찬히 맛있네. 으쩌? 깨끼 엔간히 묵었지야?"

 시무룩해져 있던 두 형제는 배시식, 단맛나는 웃음을 따라 웃었다.

 

 

 

임성용 '하늘공장'

1965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으며 구로, 안산공단에서 공장노동자로 일했다. 1992년부터 노동자문예 『삶글』에 시와 소설을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2년 제11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하늘공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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