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소통이미지

자유게시판

손석희 교수 MBC기자시절 투옥관련 글

작성자 : 나이쉰 작성일 : 2012.04.09 16:07:22 조회수 : 3090

주진우 기자의 책을 읽다가 손석희 교수가 MBC 기자시절에 노조활동 때문에 감옥에 갔던 일을 짧게 언급한 부분에서 내용이 궁금해 검색하던 중 발견한 글입니다.


그의 깔끔한 진행스타일 그대로 참 담백하고 흡입력 있는 글이기에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가 진행하는 백분토론을 총선 대비 특집으로라도 보고싶은 요즘이기도 하구요.


***** 간혹, 오타 및 띄어쓰기 오류가 보였지만, 퍼온 그대로 둡니다. (원본 링크 : http://m.cafe.daum.net/lovesonsh/7HMb/14?docid=91Fg%7C7HMb%7C14%7C20020421124520&q=)


- 나이 쉰에 나는 무엇을 보여줄까 -

밤 9시 반쯤 철창문이 열리고, 무슨 일이든 원칙대로만 한다 하여 '또바기'라고 불리던 ㅂ교도관이 내게 나오라고 고갯깃을 하는 게 보였다. 복도로 나선 내게 양쪽 사방들에서 비어져나온 손들이 인사를 한다. 폭력방, 절도방, 경제방, 교통방,그리고 독방들에서 모두들 잘 가라고 흔들어대던 손들. 길다랗고 어둠침침한 복도를 거의 다 걸어나왔을 때, 그 애처롭던 손들을 다 잡아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찔끔 눈물이 났다.그로부터 4년, 나를 향해 흔들어주던 그 손들의 의미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하기엔 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너무 편하게만 살아온게 아닌가.
나이답지 않게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20대를 청산하려 뛰어들었던 방송은 내게 또 다른 덕목을 요구하고 있었다. 순응,굴종,문제의식으로부터의 도피 들. 8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 방송을 택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식 따윈 없었다는 반증이 아니냐는 자조 섞인 원죄의식을 변명삼아 나는 주어진 일에만 몰두했다. 마치 문학의 본질이 현실인식의 반영임에도 불구하고 용기 없는 자들이 나서서 순수와 실천으로 분류해놓고는 앞의 것을 지고지선인 양 여기는 것 처럼, 이를테면 나는 방송을 그렇게 순수(?)하게 했다는 얘기다.그래서인지 일은 자꾸 늘었고 나는 툭하면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앞뒤 안 가리고 일했으며 결국 유명(!)해졌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 사이에 나는 20대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느여 그 깊이 만큼의 허위의식을 쌓아놓고 있었다.
그러고 나니 1987년이었다. 나는 6월항쟁을 직접 본 적이 한번도 없다. 내가 진행하던 뉴스의 화면을 통해서만 봤을 뿐. 다만 매일 새벽 1시쯤 태릉에 있던 집까지 가는 길에 그때까지 길 위에 남아 있던 최루가스 냄새와 깨진 보도블록의 잔해를 보며 이제 세상이 좀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껍데기만 잠깐 바뀌었다가 모든 게 원위치로 돌아갔다는 것은 그보다 훨씬 뒤에 알게 된 것이고.....
아무튼 항쟁이 끝나고 그 덕택에 문화방송에 노동조합이 생겼을때 나는 그것이 나의 삶을 전혀 다른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란 생각은 미처 해보지도 못한 채 덜커덕 가입 원서를 냈다.방황만 하던 20대를 청산하겠다고 결심하던 때의 기분으로, 나를 지배하던 허무주의를 끝장내겠다고 작심하던 때의 그 기분으로 원서를 냈을뿐이다. 방송사에서의 3년은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종류는 좀 다르지만 중세와 같았던 나의 20대를 되살려주었으므로.
해가 바뀌고 온 나라가 올림픽이 이제 한 달 남았다고 법석을 떨고 잇을 즈음의어느날, 나는 "공정방송쟁취"라고 쓰인 리본을 가슴에 달고 잔뜩 긴장한 채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노조는 첫파업을 앞둔 쟁의 기간 중 전 조합원이 리본을 달고 출연하도록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회사가 이를 방치할 리가 없었다. 몇몇 조합원들이 리본을 달고 출연하려다가 회사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포기하거나 출연이 금지되었다. 나는 첫날부터 안절부절이었다. 당시 주제에도 맞지 않는 주말 9시뉴스를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리본을 다느냐 안 다느냐는 조합과 회사측 모두의 관심사항이었던 것이다.
결국 첫날 밤 나는 양복 깃이 아닌 양복 속 와이셔츠 주머니 위에 리본을 달고 나가는 낯뜨거운 행태로 하루내내 계속된 나의고민을 마감했다. 그것은 달고 나갈 용기도 없도 달지 않을 용기도 없었던 자의 가련한 모습이기도 했다. 양복 속에서 삐죽이 보일 듯 말 듯햇던 리본을 내가 기회주의자임을 그대로 드러내주
고 있었다. 다음날 세상은 나를 비웃고 있었고 나는 이제 모든것을 반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리본 패용을 미리 보고하고 교체당할까도 생각해보았으나 그것으로 전날의 비겁함을 덮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망도 없이 허우적 대던 20대, 그 암흑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디 위해 시작했던 노조활동은 그만큼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나는 그날 깨달았던 셈이다.그날 밤, 우여곡절 끝에 세상이 다 볼 수 있게 리본을 단 것으로 나는 전날 밤 참담하게 느겼던 역겨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참으로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나의 삶도 반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떨리는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군에서 제대할 때 내가 1년 이상 모셨던 상관ㄱ 중령은 나를 위한 환송회 자리에서 내게 그랬다. "손 병장, 넌 뭘하든 한몫 단단히 할거야."
사실 나는 무슨일이든 열심히 했고 또 빈틈없이 하는 편이었다.
그는 다른 사병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나를 편애했고, 그날의 환송회도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처음으로 사병을 위해 베푼 환송회였다.그가 장래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을 때 나는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일하고 싶다 했는데 훗날 내가 문화방송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우정전화를 걸어 축하를 해주었다. 그때도 그는 환송회 때처럼 그 말을 하는 것이었다.
"넌 한몫 단단히 할거야"라고.......
나는 그 말이 단지 그의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내 능력에대한 확실한 검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들으면서도 싫지가 않앗다. 한술 더 떠서 그 말은 내게 자기 최면을 위한 주술처럼 되어서 나는 늘 '한몫 단단히 할 것'을 되뇌고 있었다.그리고 1990년 여름에 나는 다시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때 전화 속에서 들려온 그의 말은 그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아니, 당신 어떻게 그렇게 됐어!"
말끝에 느낌표를 쓴 것은 궁금해서 물어보는 투가 아니라 질타의 의미가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 실망, 나아가서는 노여움까지고 담겨 있어서 나는 언뜻 그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것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그 전해가 끝날 때쯤 결국 노조의 간부가 되었고 그가 전화를 했을 즈음에는 이미 두 번의 파업을 숨가쁘게 치러낸 직후였는데, 그는 아마 텔레비전 화면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손을 흔들어대는 나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노동조합의 간부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파업 때마다 앞장선다는 것은 단지 ㄱ중령뿐 아니라 내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을 놀라고 당황하게 한 일이었을 것이
다. 나는 그때까지 '단단히'는 아닐지라도 웬만큼은 '한몫'을 하고 있었으니까. 일부에선 저 친구가 도대체 무슨이유로 저러느냐는 비아냥 섞인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마지막에는 마음이 편한 쪽을 택했다. 그것이 노조였다.
그 후로는 ㄱ중령도 멀어졌고 또 많은 사람들과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어느 정도 높이의 담을 쌓고 지내게 되었지만, 반대로 또 많은 사람들을 얻었다. 지금은 복직이 되었지만 1천 일에 가까운 해고의 날들을 견뎌낸 안성일,김평호선배, 그리고 처음으로 노조에서 만난 이후 지금까지도 변질되지 않고 건강함을 보여주는 많은 이들이 내가 새롭게 얻은 별과 같은 사람들이다.
"I wanna go to HongKong!"
새벽녘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붙인 후 아침 햇살 속에 처음으로 둘러본 내 사방 벽에는 누군가 숟가락 끝으로 그렇게 써놓았다.
그는 홍콩사람이었을 테고 불법입국 아니면 마약 밀수 정도의 혐의로 들어와 있었을 것이다. 나의 죄명은 쟁의조정법 위반 및 업무방해. 머리맡에선 탤런트 ㅇ양이 사진 속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시간은 더디 갔다. 눈을 뜬지 한나절은 지난 것 같은데도 교도관들에게 시간을 물으면 대답은 늘 아침 9시였으니까..... 바깥에선 경찰력에 의해 회사에서 쫓겨난 조합원들이 장외 파업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따져보면 무척바쁘기도 했다. 밥 먹고,설거지하고 책보다가 면회하고, 신문보고, 운동하고, 또다시 책 보고, 밤에는 지쳐 누워 꿈 한 번 꾸지 않고 잠을 자고, 가끔씩은 수갑차고 포승줄에 묶여 검취(검찰에 취조받으러 가는 것)도 가고 했으니 그 순간순간 내게 떠올랐던 상념들을 돌이켜볼 때 그곳에 있던 시간들이 무료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마음씨 좋은 ㄱ 교도관을 비롯해 내게 언제나 큰 아량을 보여줬던 같은 사동의 사람들, 내가 그곳을 나올 대 마치 무슨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침침한 복도의 철창문 창살 밖으로 손을 흔들어주던 그들이 내 삶의 지평을 이만큼이나 넓혀준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나는 청주교도소의 ㄱ 씨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나와 같은 사동에 있던 사람으로 나보다 늦게 구치소를 떠나 군산 교도소에서 2년을 지낸 뒤 청주로 이감돼 또 2년을 살았다. 과실치사죄로 15년형을 선고받고 구치소 생활까지 합쳐 5년을 살았으니 아직도 10년이 남은 셈이다. 생각해보니 군산에 잇을 때 한 번 가보고는 이제껏 바쁘다는 핑계로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1급 건축기사 자격증을 땄단다. 그가 그 안에서 땀흘리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그가 10년후 쉰다섯의 나이로 세상에 나와 새로운 삶을 위한 집을 지을 때 쉰이 된 나는 그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이게시물에 대한 댓글 한마디

작성자 비밀번호

댓글등록

총 댓글 갯수 : 0개